문학/에세이

특별한 육아일기 <빅토리노트> 이옥선

책 고래 2024. 11. 2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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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 노트 > 이옥선


 
누군가의 일기장을 읽는다는 것은 재밌다. 블로그에 매주 주간일기를 올리고 있는데, 다른 어떤 주제의 포스팅보다도 가장 조회수가 높다. 나도 일기를 올리는 블로그를 여럿 구독하면서 찾아보고 있다. 이렇게 나와 아무 접점이 없는 사람의 일기를 보는 것도 즐거운데, 하물며 그 일기의 주제가 '나'라면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이 책은 이옥선 작가가 딸 김하나 작가를 낳은 직후 5년간 작성해나간 육아일기다. 침을 많이 흘리던 신생아 시절부터, 제법 고집이 생기고 말을 할 줄 알게 되는 순간까지 엄마가 바라본 딸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았다. 그리고 지금은 70대가 된 이옥선 작가와 40대가 된 김하나 작가의의 현재 시점에서의 코멘트가 덧붙여져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구경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하나야'와 지금의 '김하나 작가'는 두 명의 다른 사람이라고 보일만큼 차이가 큰데 빅토리 노트가 그 시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준다. 

 

있었던 사실의 나열인듯한 문체인데도 희한하게도 애정이 듬뿍 느껴진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다. 김하나 작가는 부모님의 잦은 싸움 때문에 어린 시절이 불안했다고 회상한다. 비록 그의 기억 속에서 유년기는 불안했을지라도, 이렇게 기록으로 남은 엄마의 사랑을 읽음으로서 따뜻한 기억이 새로 덮어쓰이지 않았을까? 
 
나도 곧 아기를 낳는다. 나의 아기도 훌훌 자라 성인이 되고, 나는 할머니가 될 날이 오겠지. 그때 같이 보며 낄낄 웃을만한 글을 부지런히 남겨두어야겠다. 


  

P 63

삶은 밤을 꼭꼭 씹어 먹였더니 잘 먹는다. 밤 덕분인지 변이 좋 아졌다. 하나야는 뭐든지 잘 먹는다. 밥, 생선, 죽, 과일, 과자.
엄마가 안 주어서 못 먹지 주는 건 뭐든지 먹는데, 안 주는 것도 먹는다. 예를 들면 방바닥에 떨어진 밤 껍질, 종잇조각, 머리카락, 심지어는 작은 쇳덩이(먹을 때는 몰랐는데 대변으로 나와서 알았다) 등 안 먹는 게 없다. 그래서 방바닥에 뭔가 떨어져 있으면 급히 치우는 초 비상사태(?)를 당하고 있단다.


P 65

종이나 쇳덩이도 먹는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지경이었을 때, 그때는 독박육아나 산후우울증 이런 용어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감정에 휩싸였는데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조금이라도 잘못되지 않을까 싶은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이제 두 살 반 된 아이와 7~8개월쯤 된 아이 둘을 데리고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니까 내가 마치 감시자 둘이 딸린 감옥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온종일 "맘마 먹자" "까까 줄까?" "쉬~, 똥 쌌니?" 이런 베이비 토크만 계속하다 보니 나 스스로 내가 한때 대학에 다녔고 누군가의 선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나 싶어졌다.
그냥 어른하고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4B 연필 씨는 평일에 제때 제정신으로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때는 전화도 없었고 누구에게 단 10분이라도 아이를 맡기고 바깥 공기를 쐬고 올 수도 없었다. 이 시기에 누가 조금만 지나면 아이가 자라고 곧 기저귀를 뗄 때도 오고 하니 이 육아 기간을 즐기라고 나를 설득하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p.105

얼마 전에 밖에 나갔다가 길 한가운데로 못 가게 했다고 땅바 닥에 앉아서 생트집을 부리며 우는데 엄마가 혼이 났단다. 그때 부터 집에 와서까지 울고 해서 계속 한 시간가량 소리를 지르며 울었을 거야.
책장에 있는 책을 꺼내서 책 껍질을 모두 벗겨서 방바닥에 널어 놓고 큰 통은 머리에다 쓰고 좋아한다.
엄마가 야단을 치고 때려주며 "가" 했더니 하나야가 엄마보고 "가" 하며 도로 소리 치고 엄마를 때리고 꼬집고 한다.
쾌활하고, 적극적이고, 고집쟁이고, 귀엽고, 착하고, 예쁘다.


P 169

엄마가 하나 성났니" 하면 "성났다"고 대답하고 "왜 성났니" 하 면 "성났다'며 똑같은 답을 한다. 요새는 소변이 하고 싶으면 "쉬 하고 싶을란다" 하는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밥바 먹고 싶을란다" 등 하나 맘대로 말을 지어내어서 하고 아뭏튼 엄마를 웃게 만드는구나.


P 262

뒷면에 지저분하게 비쳐나는 펜 자국을 보라. 여러분 역시
플러스펜을 써야 한다. 오래갈 기록이라면 더더욱. 가격이 싸다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플러스펜은 모나미에서
1965년에 독자 개발한 펜이다. 여전히 저렴한 가격과 심플한 디자인을 유지하며 회사 비품 등으로 애용되고 있다. 엄마가 내 육아일기를 쓸 때 사용했던 펜이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P 271

하나가 커서 이 노트를 보게 될 때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 엄마는 글씨도 왜 이렇게 못 쓸까?' 이런 소리를 하게 될 거야. 하지만 하나야, 엄마는 타고난 악필 이지만 미래의 하나를 위해서 충실치는 못했지만 가끔씩이라도 이렇게 적어놓고 싶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안개 속에 가려졌던 아득한 유아기의 자락이 조금이라도 펼쳐 보이지 않을까?
지금 엄마의 나이는 서른네 살이지만 이 노트를 받게 될 때 엄 마는 쉰 살쯤 되겠지. 젊었을 시절의 엄마의 생각, 생활이 조금은 지각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낳아서 젖 물려 재우고 따 로 서고 첫발을 내딛고, 기저귀를 떼고, 말을 한마디씩 배우고, 글자를 익히고, 순간순간이 엄마의 기쁨이었고, 고생이었고, 가슴 두근거림과 놀람 그리고 보람이었다.
다시 한번 하나야, 잘 자라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깨닫고, 그리고 스스로 만족하며 또한 만족함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P 273

다섯 살 생일로부터 40년이 지났는데도 '빅토리 노트'를 열면 여전히 축하를 받는다. 서른네 살의 엄마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들고, 매번 눈물이 난다. 엄마는 올해 일흔다섯이고 나는 마흔일곱 살이다.
탈고한 지 40년 만에 이 일기장이 엄마의 첫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온다. 인생은 멋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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