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방황 - 임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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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님은 진짜 많은 사람들 만나왔으니까 아실 거 같아서 물어보는 건데요. 인터뷰하는 거 어떠세요? 저는 제가 외향적이고 사람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만나는 게 왜 이렇게 점점 어려워지는 건지 모르겠어요. 특히 인터뷰할 때요. 처음부터 친한 척 하는 것도 웃기고, 정색하자는 분위기 딱딱해지고. 대인기피증 생길 지경이에요."
그랬더니 그 피디님이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임주리 씨, 크게 되겠네."
그리고 덧붙였다. 그렇게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라고. 인간에게 애정이 없다면 그런 고민을 아예 하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만나는 사람에게 애정을 가질 더 노력해보고, 부딪치기를 두려워 말라는 따뜻한 위로를 받으니 마음이 놓였다. 먼저 다가가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라는 걸, 더 용기 있고 멋진 일이며 결코 가벼운 일도 아니라는 걸 왜 남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을까. 오히려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누군가 말 걸어주기만을 기다리는게 배려심 없는 행동일 수 있는데. 마음이 가벼워졌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내게 살갑지 않더라도 두려워 말자 싶었다.
낯가린다는 얘기를 당당하게 하지 말기. 먼저 웃고 먼저 말 걸기. 때로는 가식적이라느니, 정치적이라느니 험한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뭐 어때. 남의 손 기다리고 있는 그쪽보다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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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연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수많은 날들을 지나며 나는 '성숙'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 사실은 내 인생에 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말을 일일이 귀담아 듣지 않는 것. 그리고 그저 나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최선을 다해 깨알같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성숙한 자세라고 말이다. 그렇게 만인의 연인을 포기하는 순간,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한 세상이 열린다는 걸 나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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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헤어지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내가 얼마나 불행한 연애를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너에게 이걸 원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걸 내가 이해하고 헌신하면 그가 언젠가 알아줄 거라는 기대를 했던 연애. 하지만 모든 기대는 아픔으로 끝났다. 일방적 헌신은 내 자신을 헌신짝으로 만들 뿐이었다. '연애는 행복하기 위해 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그때는 왜 몰랐을까.
어차피, 다 사랑 받자고 이 지랄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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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처럼 내게 들이닥쳤다가 빠져나간 그, 아니 그들이 내게 남긴 퇴적물은 반짝이는 모래알이었다. 작고 빛나는 조개껍데기였다. 때로는 씸다 버린 것 같은 미역줄기였고, 깨진 유리조각이었다. 그 모든 것이 내게 남아 나는 내가 되었다.
이별이 아팠던 것은 그 퇴적물 때문인지도 몰랐다. 옮아온 것들은 연애가 끝난 이후에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헤어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내 몸에 새겨져 있는 그의 것이 갑자기 튀어나올 때면 가슴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다. 체리쥬빌레도, 춤을 추는 일도, 연극을 보는 일도, 신문을 꼼꼼히 읽는 습관도 모두 그랬다.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던져주고 출렁이며 흐느끼며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에게도 내 흔적들이 남아있을까. 그럼 그는 떠올릴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 사랑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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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행복한 걸 인정하고, 행복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게 무섭기도 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달아날까봐 그랬다. 사랑 고백을 받아주는 순간부터 사랑이 식기 시작하는 남자라고 해야 할까. 행복을 인정하면 왠지 안주하게 될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있다. 행복은 계산하고 받는 게 아니라는 걸. 그냥 느껴지는 대로 행복하면 그뿐이라는 걸. 행복하면서도 충분히 진보할 수 있다는 걸. 작은 것을 보고 감탄하고,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차피 내게 오늘 이 하루는 딱 한 번 뿐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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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소심한 내가 상처 받는 말을 들었을 때 제대로 대응할 리 만무하다. 타이밍은 연애뿐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복장 터지는 말에 제대로 대응하기' 타이밍을 맞춰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은근히 사람을 긁는 소리를 하거나, 대놓고 핀잔 주는 말을 하는데도 직장 상사라는 이유로 혹은 나보다 나이 만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박하지 못한 적이 훨씬, 정말 훨씬 많다. 연습을 하면 이런 증상이 좀 나아질까 싶어 거울 보고 똑바로 말하는 연습을 해보기도 했지만 실전에서는 무력했다. 어쩌다 반박을 제대로 한 날에는 돌아서며 또다시 후호막심이었다. '아, 괜히 얘기했어. 참을 걸!'
이런 병이 나뿐만 아니라, 삶의 경험과 지혜가 부족한 20대라면 누구나 겪는 증상이란 걸 알았더라면 나의 그 시절이 좀 편안했을까.
관계에서 조금씩 편안함을 찾게 된 건 '정리'를 하면서부터다. 왠지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저 학교 다닐 때 같이 어울려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로 지냈던 사람, 한 번 시작했으니 왠지 계속 해야 할 것 같아서 억지로 나갔던 모임 같은 것들을 차차 정리했다. 처음에는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랬는데, 나중에는 큰마음 먹고 하나하나 실행해 나갔다.
막상 해보니 어렵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구태여 만날 필요 없었다. 아니, 진작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 시간에 진짜 내 사람들을 깊이 만나기 시작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내 인생에서 쳐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조금씩 더 행복해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눈치 봐가면서, 비위 맞춰가며 사람 만나지 말자. 대신 나를 '밝혀주는' 사람을 만나며 살자.
'밝히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길을 밝히다.'에 쓰일 때처럼 밝은 빛으로 주변을 환하게 한다는 본래의 뜻. '여자를 밝히다.'는 표현으로 쓰일 때와 같이 이성을 지나치게 탐할 때 쓰는 다른 뜻. 그러나 가만 보면 두 말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나를 '밝히는' 사람, 즉 나를 원하고 만나고 싶어 하고 탐하는 사람들이 그들 각자에서 나오는 빛으로 나를 '밝혀주는' 것이다.
얕더라도 넓은 관계를 가지고 그걸 잘 유지한다면 아마도 사는 데 큰 이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눈치 봐가며 스트레스 받아가며 그런 관계를 만들어나갈 필요는 없다. 관건은 예의를 지키는 일이다. 관계에서의 기본 매너, 상식이라고 믿어지는 예의를 지키는 일.
민규동 감독의 <내 아내의 모든 것>에는 사사건건 불만투성이에, 정의롭지 못한 일은 그냥 넘기는 법이 없는 여자 정인(임수정)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의 직장 상사와 그 부인들과 함꼐 하는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한다. 어리고 예쁜 정인을 보며 샘이 난 상사의 사모님들은 정인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그러자 정인은 대놓고 할 말을 하기 시작한다. 어안이 벙벙한 사모들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날린 직격탄. "전 예의만 지키면 눈치는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옳소! 브라보! 나는 이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외우도록 봤다. 바로 그거다. 관계에서의 기본 매너 상식이라고 믿어지는 예의만 지키고 산다면 사실 눈치 같은 것은 보지 않아도 된다.
누가 나를 욕할까, 싫어할까 걱정하며 괜히 전전긍긍하지 말기. 대신 예의를 지키며 상냥하게 조곤조곤 할 말 다 하기. 눈치는 훌훌 털어버리기. 그게 진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따라해보는 거다. 좀 머뭇거려도 된다. 대신 말끝에는 힘을 줘야 한다. 이렇게.
"저, 저는 예의만 지키면 눈치는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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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쭐하고 시크한 기분은 잠시, 매일 매일 우울함이 밀려왔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산다는 건 결국 내 삶, 구체적으로는 매일매일 이어지는 내 일상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마치 세상의 불합리와 부당함에 굴복하는 것이라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였다. 내심 '긍정'을 부정하면 마치 더 세련된 무언가가 내 인생에 나타나줄 것이라 믿었는지도 몰랐다. 산신령 앞에서 시크한 척 은도끼를 거절해놓고 속으로 금도끼를 탐내는 나무꾼처럼, 지금을 부정하면 세상이 내게 더 좋은 걸 줄 거라고.
그 간단한 사실을 나는 우울함이 진탕 내 모든 에너지를 빼내간 후에야 깨달았다. 그제야 그 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긍정적으로 살라'는 말이 가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말이 모든 걸 낙천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도. 그건, 탓할 건 탓하고 맞설 건 맞서되 내 존재 자체를 깊이 긍정하고 매일 내게 일어나는 일에 기본적으로 감사하라는 말이었다. 그래야 행복해진다는 것. 해보니 절절히 와 닿았다.
최근 한 예능프로그램에 탤런트 백일섭 씨가 나와 인기를 끌었다. 또래의 노년 연기자들과 함께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에서 그는 늘 뒤쳐지고 구시렁댔으며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내 장점은 긍정적으로 산다는 거죠. 짜증내고, 불평을 해도 그게 다 긍정적이라서 그런 거예요. 꾹꾹 눌러 참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어딘지 모르게 모순적인 그 말이, 어딘지 모르게 이해됐다. 할 말은 하고 바꿀 건 바꾸되 내 삶 자체를 깊이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 그게 진짜 '긍정'이다. 늘 뒤쳐지고 구시렁대더라도 상관없다. "아, 행복해. 오늘도 신나요."라고 뜨거운 햇빛을 꾹꾹 찹고 걷다가 쓰러지는 것보다는 백 배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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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랬다. 그때 그 순간의 기회를 노혀버리면 샹젤리제 아이스크림처럼, 매 한낱 꿈처럼 사라져버렸다. 비슷한 건 만날 수 있었지만 '그때 바로 그것'을 다시 만나게 되기란 쉽지 않았다. '샹젤리제 아이스크림'은 그나마 난이도가 낮은 편에 속했다. 뭔가를 배우거나 도전하는 일을 너무 많이 고민하다 노혀 버리면 두고두고 후회하곤 했다.
그걸 알면서도 막상 하려고 하면 망설여졌다. '완벽한 준비'에 대한 강박 때문이었다. '막상이란 말만큼 인간의 간사함과 초라함과 소심함을 드러내는 단어가 또 있을까. '막상' 하려고 보면 스스로 완벽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주저하다 포기하곤 했다.
그냥, 지금, 여기에서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좀 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냥 지금 여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고, 그냥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쓰레기를 치우고. 그냥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더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