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고래 블로그
한 스푼의 시간 - 구병모 (에담) 본문
시작
p.7
평균 연령 20세가량의 빌라 골목이다. 엊그제 막 신축이 끝나 건축 자재와 도배장판 냄새가 나며 카드키를 댈 때마다 LED 센서가 발광하는 빌라 옆으로, 마당에는 감나무가 서 있고 장마철이면 때때로 물이 차는 반지하방마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세 들어 사는, 40년 가까운 2층 주택이 나란히 자리한 식이다.
p.157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p.170
은결에게 선을 긋는 시호
그러나 사람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 대개 적의와 비난의 언사로 흘러넘치는 세계에서 그나마 들어줄 만한 말이라곤 공허한 말장난이나 모호한 비유 정도일 것이다. 그 밖에도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을 마주 대하며, 하기 싫은 일을 많이 양보해서 다섯 번 가운데 한 번은 하고, 맞추고 싶지 않은 분위기를 띄우며, 때론 누군가를 휴지통으로 삼기는커녕 누군가 뱉어낸 쓰레기를 자신이 기꺼이 삼켜주는 일도 한다. 그러므로 시호는 조율과 적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누르거나 지우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시호는 자신이 그밖의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무엇보다도 나는 꿈을 꿀 줄 아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고 싶어."
은결은 사람이 말하는 꿈에 크게 두 가지 다른 뜻이 있음을 안다. 그녀의 입에서 터지는 겹자음의 경음은 푸른 멍이 든 자리에 붙인 반창고 같다.
"잠들어 꿈을 꾸고 거기서 깨어날 줄 아는 사람, 꿈을 그리거나 그렸던 적 있는 사람과 살아갈 거야. 깨어난 뒤 남아 있는 것이 악몽뿐이라도 상관없고, 깨어져 형태를 잃은 꿈의 파편을 쓸어 담으면서 살아갈 뿐이라도 괜찮아. 거기에 뭉개고 뒹굴지만 않는다면, 손대지 않으면 적어도 베이지는 않을 테니까."
깨다.
깨다.
꿈에서 깨다. 꿈을 깨다.
꿈의 깸. 꿈의 깨어짐.
깨어나거나 깨어질 것을 전제로 하는 인간의 꿈은 어느 쪽 의미여도 그녀에게 무관한 것이다.
한 스푼의 시간
p.184
봐라, 네 안에는 물리학과 생물학뿐만 아니라 화학 천문학까지 들어 있지. 너는 지금까지 사람이 밝혀낸 한도 내에서 우주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을 거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은결에게 작별할 준비를 하는 명정
p.192
간헐적이던 가슴 통증이 문득 팽창하며 명정의 갈비뼈를 두드린다. 통증의 파편들이 몸속으로 부드럽게 퍼져나가면서 자신의 존재에 익숙해지기를 요구한다. 이제 와 하나 마나 한 생각이지만 처음부터 이름을 붙여선 안 되는 거였다. 그 이름은 언제까지고 펼칠 일이 없는 종이 속에 접어두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름을 붙여준 것을 떠나보내는 방법에 아직도 익숙지 않다.
낡아가는 은결
p.194
무엇보다도 로봇은 놀라움을 모른다. 놀라워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사람뿐이다. 내장 시계가 느려지고 있다는 것, 고장 났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 외에 관절의 움직임이 예전과 달리 섬세함이 덜하다는 것. 기상청에서는 가뭄을 염려할 만큼 맑고 따가운 날이 한동안 이어지는데도 충전에 조금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 이 모든 변화와 증상들은 한데 모여 분명 어떤 표지가 된다.
(중략)
그동안 은결을 소극적으로 활용하느라 일상생활에 불편이 없어서 잊었던 사실이지만, 매뉴얼에 따르면 이 a1318b 기종은 최소 1년에 1회, 길면 3년에 1회꼴로 메인터넌스가 권장된다. 은결은 그 어떤 보수 유지 관리도 되지 않은 채 9년째 명정의 곁에 머무르고 있다. 단순한 구조의 가습기나 정수기도 주기적으로 필터를 청소하거나 교체해야 오래 쓰는데 이 초정밀 고성능 로봇은, 말이 9년이지 겉보기와 달리 내부 상태는 위험 수준에 이르렀을지 모른다.
정명의 죽음
철문을 닫을 때 은결의 머릿속에서 문득 이명을 닮은 잡음이 울리는데, 언젠가부터 내부 시스템에 사소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런 식으로 명령어가 재구성되고 전기 신호가 재배열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 소리와는 아무적 논리적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은결은 이튿날 주인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차린다.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미 발생한 모든 일이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의 신호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은결은 텔레비전의 심야 고전 영화를 비롯하여 인간이 꾸며낸 수많은 서사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 있다. 우연히 손에서 미끄러진 물 잔이 깨어지자 먼 데 떠난 연인에게 닥칠 불운을 예감하는 주인공. 수 십 년 동안 쉬지 않았는데 조부의 운명과 함께 멈춰버린 괘종시계. 학습한 사실에 따르면 그런 현상을 동시성의 원리로 이름 붙인 꿈심리학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비과학에 미신 사고로 인식하며, 그러면서도 초현실이 들려주는 수많은 예고에 아낌없이 감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예지몽을 꿀 수 없는 로봇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 무너진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건물이 아닌 사람이 무너진다는 의미를 분명히 학습한 적 있고 자신이 그렇게 될 일은 없으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 은결의 몸속에서 외부에 발산되지 않는 경보음을 비롯한 온갖 오류 메시지가 출력되고, 은결은 시호의 내민 손을 응대의 법칙에 따라 정중하게 쥐는가 싶더니 손끝이 닿는 순간 모로 무너져 내린다. 가장 먼저 후각이 꺼지고 촉각이 사라지며, 당황해서 이름을 부르는 시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야가 급격히 축소되는가 싶더니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외부 감시 및 감각 시스템이 강제 종료되며 은결의 눈꺼풀이 감긴다.
유언을 따르지 않는 은결
p.221
바로 뒷장에 그동안 주인으로서 관찰한바 기계적 설명이 어려우며 인간의 반응에 가깝다고 판단한 몇 가지 사례가 이어진다. 밤거리로의 목적 없는 불규칙한 산책과 방황, 선물을 받고 난 뒤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 마치 관심을 갖거나 특별히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텔레비전 프로그램, 어린 소녀에서 처녀애로 자라난 이웃집 여성에 대한 연심, 그리고 이 모든 사례는 시스템 오류나 고장에 의한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 확인 부탁드린다는 이야기.
분명 주인과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불충분하게나마 나눴고 은결은 연구실에 가기로 결정된 약속과 준교의 예정을 잘 아는데, 이렇게 주인의 필체로 눌러쓰니 그 약속의 크기와 무게가 비로소 견고한 현실이 되어 그에게 다가운다.
가벼운 충동이나 변덕 비슷한......
은결은 문득 편지를 접어 넣고 봉투째로 찢기 시작한다. 주인의 간절한 부탁과 성실한 기록이 한 자 한 자 흩어져 휴지통으로 떨어진다. 그 어떤 명령도 없이 그 누구의 지시도 없이, 적절한 연산 과정을 거쳤는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순간적으로. 주인이 기록한 충동이란 바로 이런 모습인지도 모르며, 은결은 그 기록에 부합하는 행위를 지금 처음 한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다. 은결은 자신이 스스로의 개체를 보존하기 위한 바람직한 일을 했는지를 모르지만 일단 주인의 마지막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안다.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라는 말을 사용하는 때는 꼭 이런 순간일 것이다.
끝
p.249
아이가 훗날 자라 그 약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대도, 그는 괜찮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아이가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완전히 멈출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이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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